강릉 가뭄 사태가 남긴 교훈, 물 관리 새로운 대책 필요

강릉을 비롯한 강원 동해안 지역의 가뭄은 올해 또다시 극단적 위기를 불러왔다.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제한급수와 급수차 동원에 재난 사태까지 선포된 상황은 더 이상 단순한 자연현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가뭄은 불가항력적이지만, 반복된 피해와 관리 실패는 명백한 인재에 가깝다. 이번 사태는 물이 인간 생존의 최전선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우며, 미래 세대를 위한 수자원 관리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한다. 1. 물 부족은 예견된 재난이었다 우리나라는 동고서저의 산악 지형 탓에 하상계수가 세계적으로도 높은 편이다. 이는 곧 강수량의 변동 폭이 커서 가뭄과 홍수가 주기적으로 발생한다는 뜻이다. 올해 강릉이 겪은 위기도 특별한 일이 아니라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현상이었다. 문제는 이를 관리할 제도적 준비가 부족했다는 데 있다. 댐과 저수지 같은 인공 구조물에 대한 선제적 투자가 지연되었고, 예산과 행정 의사결정 과정도 더뎠다. 정부가 계획한 14개 신규 댐 건설이 지역 반대에 밀려 9곳으로 축소된 것은 단기적 반발을 의식한 결정일 수 있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국가 물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 결국 이번 사태는 단순한 강수량 부족 문제가 아니라 준비 부족이 불러온 총체적 위기였다. 가뭄이 재난으로 확대되지 않으려면 ‘예상된 위험에 대한 지속적 대비’가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한다. 2. 성공 사례에서 배우는 교훈 강릉과 가까운 속초는 같은 조건에도 올해 큰 위기를 피했다. 속초는 20여 년 전부터 지하댐을 건설해 비상 수자원을 확보하고, 지하수 개발과 수도관 정비, 정수장 현대화 등을 통해 유수율을 크게 끌어올렸다. 충남과 충북도 각각 보령댐 공급망 확충, 지천댐 건설, 대형 저수지 정비 등을 통해 물 부족 사태를 극복한 경험이 있다. 이 사례들은 한결같이 ‘장기적 계획과 꾸준한 투자’가 위기를 막았음을 보여준다. 물 관리는 단기간의 임기응변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속초가 가뭄을...

가을 귀를 여는 법 귀뚜라미가 들려주는 듣기의 미학

한여름의 매미 울음이 점점 잦아들면 초저녁에는 풀벌레가, 깊은 밤에는 귀뚜라미가 우리 곁을 채운다. 소리는 계절을 알리는 신호이자 마음의 풍경을 바꾸는 매개다. 귀뚜라미 소리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귀가 열리고 평소 놓치던 소소한 감정들이 비로소 들려온다. 이 글은 귀로 듣는 행위가 단순한 감각 수용을 넘어 인식과 공감의 출발점이 되는 과정을 세 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살피고 마지막에 실천적 제언으로 마무리한다. 1 듣기는 인식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눈과 귀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시각 정보가 눈에 보이는 사실을 제공한다면 청각은 사건의 맥락과 정서를 먼저 전한다. 누군가가 “거기 한 번 가보자”라고 말하면 시각적 이미지 이전에 그 제안의 감정적 뉘앙스가 귀를 통해 포착된다. 사람의 목소리 주파수는 300~800Hz 사이에서 가장 편안하게 들린다. 같은 말이라도 음색과 말투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날카로운 고음은 방어를 불러오고 낮고 안정적인 저음은 집중을 유발한다. 그래서 설득과 공감에서 ‘먼저 귀를 사로잡는 기술’은 종종 눈으로 보여주는 기법보다 강력하다. 정치 연설, 고객 접대, 면접 등에서 목소리와 말투가 곧 신뢰와 태도의 첫인상으로 작용하는 이유다. 2 귀뚜라미의 울음이 일깨우는 마음의 귀 귀뚜라미 울음은 단순한 자연 소리가 아니다. 고려 시대 궁녀들이 귀뚜라미 소리를 길렀다는 기록은 그 소리가 외로움과 향수를 달래는 위로의 기능을 했음을 증명한다. 초가을 풀숲에서 울던 귀뚜라미가 점차 집 안으로 다가오는 현상은 기온 변화에 따른 생물학적 반응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계절의 정서로 해석했다. 맑고 낮은 울림은 듣는 이를 안정시키고 마음의 여백을 만든다. 마음의 귀가 열리면 사소한 소리들—낙엽 스치는 음, 논두렁 농부의 외침, 시장 상인의 목소리—까지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귀뚜라미 소리는 우리를 ‘듣는 존재’로 돌려놓는다. 3 잘 듣는다는 것의 사회적 효과 타인의 사정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면 오해와 갈등이 생긴다. 친구가 커피값...

AI가 함께 만드는 합주의 시대가 온다

합주에서 나오는 울림은 단일 악기가 낼 수 있는 소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기타 한 대의 독주는 매력적이지만 여러 악기가 조화를 이룰 때 얻어지는 화음과 깊이는 비교할 수 없다.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동일한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하나의 거대 모델이 모든 문제를 풀려 하기보다 여러 전문 AI가 역할을 분담하고 협업하는 다중 에이전트 방식이 부상하고 있다. 이 흐름은 단순한 기술적 진화가 아니라 신뢰성 설명가능성 책임성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는 구조적 전환이다. 본 칼럼은 다중 에이전트의 개념과 장점 적용 사례와 한계 마지막으로 정책과 윤리적 과제를 차례로 살펴본다. 다중 에이전트의 구조와 핵심 장점 다중 에이전트 방식은 여러 AI가 오케스트라의 악기처럼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아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패러다임이다. 한 에이전트는 자료 수집과 정리, 다른 에이전트는 가설 생성, 또 다른 하나는 비판적 검토와 팩트체크를 맡는다. 이렇게 역할을 분할하면 각 에이전트는 자신에게 적합한 목적에 최적화된 모델로 구성될 수 있고 복잡한 문제는 모듈화된 흐름으로 처리된다. 장점은 명확하다. 첫째 효율성 향상이다. 전문화된 에이전트는 특정 업무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한다. 둘째 오류 억제다. 서로 다른 관점의 에이전트가 상호 검증하면 잘못된 결론이 걸러진다. 셋째 설명 가능성이다. 토론 과정과 의사결정 로그가 남기 때문에 인간 사용자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하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의료나 금융처럼 실수 비용이 큰 분야에서 이점은 곧바로 신뢰 확대로 연결된다. 현실 적용 사례와 실전적 효과 최근 마이크로소프트의 의료 진단 사례는 이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섯 개의 에이전트가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고난도 사례를 평가한 결과 85퍼센트 이상의 정확도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동일한 사례에서 인간 평균 정확도보다 훨씬 높은 성과다. 중요한 점은 이 결과가 개별 모델의 비약적 개선이 아니라 에이전트 간 조율, 즉 오케스트레이션의 성과였다는 사실...

립스틱 지수에서 디지털 지수로 경기 심리를 읽다

레너드 로더 에스티로더 명예회장이 남긴 립스틱 지수라는 개념은 통속적이면서도 통찰적이다. 불황기에 소비자들이 값비싼 사치품을 피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립스틱을 사는 행동 양식에서 출발한 이론은 경제심리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경제는 수치와 통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불안과 희망이 소비로 표출되고 그 미세한 신호가 때로는 거대한 흐름의 전조가 되기도 한다. 다만 립스틱 지수처럼 간단한 민간 지표는 시대적 맥락과 돌발 변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본 칼럼은 민간 지표의 의미와 한계, 공식 지표와의 관계,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등장할 새로운 심리지수의 방향을 세 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심층적으로 살핀다. 민간 지표의 가치와 한계 립스틱 지수나 헴라인 지수 같은 민간 지표는 사람들의 삶 속 관찰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공식 통계가 나오기 전 소비자 심리를 먼저 포착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예컨대 특정 품목의 판매량 증감이나 일상적 행동의 변화는 소비자의 가처분소득과 불안 수준을 반영할 수 있다. 이러한 지표는 빠르게 현장의 분위기를 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해석의 오류에 취약하다. 사회적 규범 변화 기술 혁신 같은 구조적 변수가 개입하면 전통적 상관관계는 깨진다. 립스틱의 예를 보면 팬데믹 기간 마스크 착용이 확산되자 립스틱 수요가 급감했다. 즉 동일한 경기상황이라도 사회적 조건이 달라지면 행동 패턴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간 지표는 맥락과 보완지표를 함께 고려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신호로 작동한다. 공식 지표와 민간 지표의 공존 전략 정책 결정과 시장 예측에서 공식 통계는 여전히 중심적이다. GDP, 실업률, 소비자물가, 수출입 지표 등은 경제 상태를 구조적으로 진단하는 데 필수적이다. 다만 공식 지표는 시차가 존재하고 표본과 조사 방식의 한계가 있다. 이 점에서 민간 지표는 보완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한국은행의 소비자동향지수와 기업경기실사지수는 설문을 통해 주관적 체감도를 측정한다. 여기에 립스...

이주노동자 사회 통합과 인권의 문제 다시 묻다

스위스 극작가 막스 프리쉬의 말처럼 우리는 종종 노동력만을 부른다 노동자가 왔을 때 비로소 사람이 마주한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한국 사회가 급속한 산업화와 인구구조 변화 속에서 외국인 노동자에게 의존하는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 우리 부모 세대가 독일로 떠나 광부와 간호사로 일했던 역사를 반추하면 오늘의 이주노동자 문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반복되는 인권 침해와 잇단 사고는 제도적 보호와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충분치 않음을 가리킨다. 이번 칼럼은 이주노동자 문제의 구조적 배경 노동권과 인권의 현주소 그리고 지속가능한 포용 전략을 세 갈래로 분석하고 결론적으로 정책적 제언을 제시한다. 1 구조적 필요와 현실의 간극 저출생과 고령화로 노동 인구가 급감하는 한국은 이미 많은 산업 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제조업 조선업 건설업 농축산업은 물론 서비스 및 돌봄 분야까지 다양한 직종에서 이주노동자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이들은 국내인이 기피하는 업무를 맡아 국가적 생산성을 지탱한다. 반면 제도적 장치와 실제 처우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고용허가제나 산업연수생 제도 등 외형적 프레임이 있지만 노동권 보장 안전 교육 주거 복지 접근성 등 기본적 생활 여건은 여전히 취약하다. 이러한 구조적 결함은 단기 인력공급의 편리함 뒤에 숨어 있는 인권 비용을 초래한다. 단순히 외국 인력을 유치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체계적 관리와 장기적 사회통합 전략이 병행되어야 한다. 2 인권과 노동권의 실제적 침해 사례들 최근 전남 나주 공장의 조롱 영상과 경북 구미의 폭염 사망사건은 충격을 넘어 사회적 각성을 요구한다. 현장에서 벌어진 인권 침해와 안전 무시는 개별 가해자의 문제를 넘어서 고용주 감독 소홀 행정 감독체계의 허점 등을 드러낸다. 다수 이주노동자가 휴게권과 적정 근로시간 보장 임금 체불 의료 접근 제한 언어 소통의 어려움으로 권리 주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고는 반복된다. 특히 산업재해 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