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외국어 전공의 몰락과 부활의 길
1989년 1월 1일, 한국 사회는 하나의 분수령을 맞았다. 바로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해외여행은 일부 부유층과 50세 이상 연령대에게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은행에 거액의 보증금을 예치하고,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에 들러 반공 서약을 해야만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누구나 국경을 넘어 세계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곧 외국어 전공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듯 보였다.
외국어 전공, 개도국 시대의 황금 티켓
고도성장과 수출 중심 경제는 곧 외국어 능력을 국가 경쟁력과 동일시했다. 영어, 불어, 독어는 소위 ‘영불독’으로 불리며 대학가의 최고 인기 전공 반열에 올랐다. 이들 전공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취업 보증수표였다. 외국어를 잘하면 공공기관과 대기업의 문이 활짝 열렸고, 국제 무역과 외교의 최전선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법대와 상과대가 안정적인 진로를 보장했다면, 외국어 전공은 ‘세계로 향하는 티켓’이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수출 시장이 공산권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중국어, 러시아어, 심지어 베트남어 같은 동남아 언어까지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비인기 소수어로 취급되던 언어들이 갑자기 각광받으며, 어학 전공자들은 말 그대로 시대의 주인공이었다.
세계화와 AI가 불러온 위기
그러나 세계화의 진전은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어 전공자들에게 위기를 안겨주었다. 외국 인력이 대거 유입되면서 언어 장벽은 점점 낮아졌다. 특히 소수어 전공자들은 개도국 출신 이주민들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희소가치가 급속히 떨어졌다. 한때 상종가를 치던 언어 능력이 더 이상 특별한 경쟁력이 되지 못한 것이다.
불어와 독어는 가장 먼저 타격을 받았다. 고등학생들이 제2외국어로 기피하면서 교사 임용 시장부터 막혔고, 대학 전공자들은 교단 진출의 길이 끊겼다. 최근에는 주요 국립대에서조차 불어, 독어, 중국어 학과를 통합하거나 폐지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는 학과도 늘어났다. 외국어 전공은 그야말로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AI 번역기와 어학교육 무용론
AI의 등장은 이 위기를 더욱 가속화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인공지능 기반 번역기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스마트폰 앱 하나면 실시간으로 외국어 대화를 번역할 수 있고, 심지어 동시통역 수준에 근접한 기능까지 구현됐다. 각종 박람회에서는 AI 동시통역 서비스가 시연되며 관람객의 탄성을 자아냈다. 그 결과 “굳이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있느냐”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전문 통번역사는 AI가 대체할 직업 1순위로 꼽히고 있다. 한때는 고소득 전문직으로 각광받던 통번역사조차, 지금은 AI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어학교육 무용론은 학계와 산업계 전반에 충격을 던졌다.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
그러나 정말로 외국어 전공의 미래는 어두운 것일까?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기계가 단어와 문장을 바꾸어 전달할 수는 있지만, 언어 속 깊이 담긴 뉘앙스와 맥락까지 완벽히 구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 문장의 억양, 목소리의 떨림, 단어 선택에 담긴 문화적 배경은 단순한 번역을 넘어선 인간의 영역이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그 속에는 수백 년의 역사와 문학, 예술, 철학이 스며 있다. 기계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인간이 느끼는 울림과 감정의 결은 구현하기 어렵다. 결국 ‘언어 속 의미 전달’이라는 본질적 가치에서 인간의 역할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하다.
어학과 공학의 융합이 답이다
외국어 전공자들의 활로는 어디에 있을까? 전문가들은 언어 능력과 첨단 기술의 결합에서 답을 찾는다. 단순히 외국어를 잘하는 것을 넘어, AI를 활용해 다국어 데이터를 분석하고, 언어와 사회 현상을 융합 연구하는 학문적 확장이 필요하다. 어학과 공학의 융합은 언어 전공자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예컨대 다국어 빅데이터 분석, 인공지능 학습용 언어 코퍼스 구축,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인터페이스 설계 등은 외국어 전공자가 AI와 협력할 수 있는 대표적 영역이다. 언어를 통해 사회와 사람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통찰은, 기계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가치다.
인문학의 부활과 어학의 미래
AI 시대의 역설은 인문학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는 점이다.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 곧 인문학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문의 기초이며, 따라서 어학은 여전히 인류가 반드시 붙들고 가야 할 학문이다. 단순히 ‘외국어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읽고 기술을 이해하는 융합 인재가 필요하다.
맺음말
1980~90년대 외국어 전공은 한국 사회의 전성기를 함께 누렸다. 그러나 지금은 AI와 세계화 앞에서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은 반드시 남아 있으며, 오히려 기술과 결합할 때 새로운 활로가 열릴 수 있다. AI 시대의 어학은 몰락이 아니라 진화를 요구받고 있다. 언어와 인간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그 가능성을 열어가는 것은 지금의 외국어 전공자와 대학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