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그루밍 시대 외모 가꾸기

인간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치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왔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오히려 이례적인 현상이다. 대부분 동물 세계에서는 암컷이 짝짓기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수컷은 화려한 외모와 과시적 행동으로 암컷의 선택을 받으려 한다. 공작 수컷의 화려한 꼬리나 사슴의 웅장한 뿔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인류 사회에서 여성의 치장이 강조된 것은 경제와 권력 구조의 변화와 맞물려 나타난 특수한 문화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중심에서 남성 중심으로 이동한 권력의 역사

원시 사회에서 여성은 열매 채집과 육아를 담당하면서 공동체 내 권력을 가졌다. 가끔 사냥에 성공하는 남성보다 여성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짝 선택권도 여성에게 있었다. 이 시기 여성은 치장할 필요가 크지 않았다. 모계 사회가 주류였고, 남성은 단순히 DNA를 전달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농사에는 근육과 힘이 필요했고, 토지와 생산 수단을 장악한 남성이 점차 권력을 쥐게 되었다. 정착 생활과 함께 일부일처제 가족 제도가 정착하면서 가부장제가 사회 질서의 기반이 됐다. 근대 이후 산업혁명과 기술 발전은 힘보다 지식과 기술이 더 중요한 시대를 열었다. 근육 중심의 남성 권력은 약화됐고, 여성은 투표권과 경제 참여를 확대하면서 권리의 지평을 넓혔다. 더 이상 여성은 생존을 위해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고, 혼인율 저하와 이혼율 증가는 이런 사회적 변화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남성이 외모 가꾸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역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급성장하는 남성 화장품 시장

최근 남성들이 외모를 가꾸는 현상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거대한 산업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한국은 남성 화장품 소비 규모와 성장 속도에서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연간 스킨케어 소비액은 세계 1위를 기록했으며, 이미 2010년대부터 인구 대비 화장품 사용 비율도 압도적이다. 국내 남성 화장품 시장은 2019년 1조 원 규모를 돌파한 이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화장품 업계는 더 이상 남성 제품을 틈새 시장으로 보지 않는다. 여성 수요가 포화 상태에 이른 만큼, 남성 소비자는 미래 생존을 좌우하는 핵심 공략 대상이다. PX와 같은 군부대 매장에 유명 화장품 브랜드가 진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거 '군인은 위장크림'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이제는 '쿨링 수분크림'과 '옴므 올인원 솔루션'이 군인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전통적으로 남성성을 대표하는 집단에서도 외모 관리가 일상화된 셈이다. 특히 MZ세대 남성들의 그루밍 열풍은 기초 화장품에 머무르지 않는다. 색조 화장품 사용과 각종 피부 시술, 심지어 다리털 제거기와 같은 뷰티 기구 사용까지 확장되고 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남성들의 BB크림, 파운데이션, 립밤 사용률이 꾸준히 증가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여자친구나 아내의 권유로 제품을 구매한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남성 아이돌 그룹이 화장 문화를 대중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문화적 변화와 젠더리스 흐름

남성 뷰티 시장의 성장은 단순히 소비 현상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변화와도 연결된다. 젠더리스, 페미니즘,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개념들이 확산되면서 성별 고정관념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이제 남성이 화장을 한다고 해서 낯설게 보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유럽 등 전통적으로 마초 문화가 강한 지역에서도 남성 화장품 사용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문화사회학자들은 이를 사회 전반의 가치관 변화로 해석한다. 과거에는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규범이 강했지만, 이제는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다.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주에서 화장실의 성별 구분을 없애는 움직임이나, 일본과 한국에서 등장한 '초식남' 현상도 같은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위가 심해진 최근에는 직장에서 남성도 반바지나 치마를 입을 수 있도록 복장 규정을 풀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외모 관리와 패션에서의 성별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결론 새로운 남성성의 시대

남성의 그루밍 열풍은 단순한 외모 관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전통적인 성 역할이 무너지고, 개인의 선택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산업적으로도 남성 뷰티 시장은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닌 핵심 성장 동력이 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흐름을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제도와 문화 속에서 조화롭게 안착시키느냐이다. '여성만 치장한다'는 오래된 통념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자신을 가꾸고 표현하는 주체로 인정받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