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한국 산업 경쟁력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2020년대 들어 지정학적 갈등, 팬데믹, 에너지 전환, 기후위기, 공급망 탄력성 강화 요구 등 복합적 요인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세계 기업들은 단일 국가나 지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기존 모델의 취약성을 깨닫고 공급망을 다변화하거나 국가 내 재배치, 근거리 조달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수출 중간재와 제조업 의존도가 높아 이 같은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위협이자 기회다. 위기는 공급 차질과 비용 증가로 산업 전반에 부담을 주지만, 전략적 대응을 통해 한국 산업 경쟁력을 제고할 계기로도 삼을 수 있다. 이 글은 공급망 재편의 주요 흐름을 짚고 한국 산업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을 제안한다.

1 핵심 공급망 변화의 방향과 한국의 노출 지점

공급망 재편의 핵심 축은 다각화, 근거리화, 전략적 자급화, 디지털화다. 다각화는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조달처를 복수화하는 것이고 근거리화는 제조를 수요지 가까이 옮겨 운송비와 리스크를 줄이는 전략이다. 전략적 자급화는 반도체, 배터리, 희소금속처럼 국가 안보와 직결된 핵심 품목을 자국 또는 우호국 기반으로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다. 디지털화는 공급망 가시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여 충격 대응력을 키운다. 한국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자동차 부품 등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중간재와 핵심부품을 공급하는 허브 역할을 해왔다. 이 구조는 수요처의 변동에 따라 큰 이익을 가져왔으나 동시에 지정학적 분쟁이나 생산 차질 시 높은 노출을 의미한다. 특히 중국 시장 의존도, 해상운송 중심의 긴 운송로, 일부 핵심 원자재의 해외 의존 등은 취약점으로 지목된다. 따라서 변화의 방향을 정확히 이해하고 산업별 취약 지점을 세밀히 진단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2 기회 요인과 산업 경쟁력 강화 전략

공급망 재편은 한국 기업과 정책에 여러 기회를 제공한다. 첫째, 고부가가치 중간재와 핵심부품의 국산화 또는 근거리 재배치로 제조업의 업스킬 전환을 촉진할 수 있다. 반도체나 전지 소재처럼 기술 진입장벽이 높은 분야는 국내 투자 확대와 R&D 집중을 통해 글로벌 경쟁 우위를 공고히 해야 한다. 둘째, 친환경 전환과 탄소 국경 조정장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저탄소 생산 역량은 새로운 비교우위가 된다. 재생에너지 기반 제조, 그린 수송 물류, 탄소배출 감축 기술을 패키지로 제시하면 해외 수요를 끌어올 수 있다. 셋째, 첨단 제조와 디지털 공급망 관리 기술을 결합해 스마트 팩토리와 플랫폼 기반 공급망 서비스를 수출형 산업으로 육성할 수 있다. 넷째, 동아시아 내 근거리 조달망을 활용해 아세안, 베트남 등 신흥 생산기지와의 협력 가치사슬을 재편하면 리스크 분산과 비용 효율을 동시에 꾀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선 기업의 투자 유인과 함께 노동·환경·세제 정책의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 기술 중심의 고부가 혁신, 탄소 감축 역량, 디지털 공급망 서비스는 한국이 공급망 재편 속에서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핵심 축이다.

3 정책적 과제와 거버넌스

기업의 전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이 공급망 전환의 속도와 품질을 좌우한다. 우선 핵심 소재와 부품의 전략비축과 다자간 협력체 구축이 필요하다. 전략비축은 에너지와 원자재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반도체용 특수가스, 전지용 희유 금속 등에도 확장해야 한다. 둘째, 인프라 투자와 규제 개선을 통해 근거리 생산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항만·철도·전력망·데이터센터 등의 기반을 보강하고, 투자 허가와 노동 규제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 기업의 장기투자를 유도해야 한다. 셋째, 중소기업의 글로벌 밸류체인 참여를 지원하는 정책이 중요하다. 기술 제휴, 공동 R&D, 품질 인증, 금융·보험 지원을 통해 작은 기업도 재편된 공급망에서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국제협력과 외교적 리스크 관리는 필수다. 경제 안보와 자유무역의 균형을 맞추고, 공급망 회복력 강화를 위한 다자간 안전망 구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력정책이다. 제조업의 디지털 전환과 고도화에 맞춘 인재 양성, 재교육 프로그램, 산학협력 강화로 노동시장의 구조적 전환을 지원해야 한다.

결론 한국의 선택과 실행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통제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외부 충격과 지정학적 변수는 계속될 것이며 기업과 국가는 이에 적응해야 한다. 한국에게 중요한 것은 수동적 피해자가 아니라 능동적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산업별 취약성 진단, 핵심 전략품목의 선제적 확보, 저탄소·첨단 제조로의 정책적 전환, 중소기업과 지역 산업의 포용적 참여, 그리고 국제협력 기반의 다층적 안전망을 결합한 종합적 전략이 필요하다. 실행력은 규범과 재정, 인적 자원 투입에서 나온다. 궁극적으로 공급망 재편은 비용이 들지만, 이를 기회로 전환하면 한국 산업은 더 탄력적이고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전략은 지금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실효를 거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