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제도화 필요성
가상자산은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일부 기술 마니아나 투기적 투자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같은 대표적 암호화폐는 글로벌 금융시장에 뿌리내렸으며, 블록체인 기반 기술은 금융뿐 아니라 물류, 게임, 예술, 헬스케어 등 다방면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 역시 가상자산 투자 인구가 수백만 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지만, 정작 제도권의 대응은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규제는 모호하고, 투자자 보호 장치는 부족하며, 산업의 건전한 발전은 더디다. 세계 각국이 이미 가상자산 제도화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가운데, 한국도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 무규제 상태가 낳는 사회적 비용
가상자산 시장은 본질적으로 가격 변동성이 크고, 신생 산업 특유의 불안정성이 내재돼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뚜렷한 법적 틀이 없어 이러한 위험이 고스란히 개인 투자자에게 전가된다. 실제로 국내외 가상자산 거래소 해킹 사건은 수천억 원대 손실을 남기며 투자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또한 프로젝트 운영자들이 자금을 모은 뒤 돌연 사라지는 ‘먹튀 코인’ 사건도 적지 않았다. 이런 피해 사례가 반복되면서도, 피해자들이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없다. 정부와 금융당국의 명확한 관리 감독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투자자 불신은 커지고, 사회적 불만도 누적된다. 더욱이 무규제 상태는 범죄 위험까지 동반한다. 가상자산이 자금 세탁, 불법 도박, 마약 거래 등 불법 활동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현재와 같은 방임 상태는 투자자 개인의 피해뿐 아니라 금융 질서 전반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2. 해외 주요국의 제도화 흐름
이와 달리 해외 주요국은 이미 제도권 편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를 통해 가상자산을 증권 혹은 상품으로 분류하여 감독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까지 이뤄져 제도권 금융시장과의 연결 고리가 공고해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3년 ‘MiCA(Markets in Crypto-Assets)’ 법안을 통과시켜, 발행·거래·보관 등 가상자산 전반에 걸친 통합 규제 체계를 마련했다. 일본은 금융청을 중심으로 거래소 인가제, 자본금 요건, 고객 자산 분리 보관 등을 엄격히 시행하면서 시장을 안정시켰다. 싱가포르는 가상자산 사업자에게 라이선스를 부여하고 자금세탁방지 규제를 강화하며 투명성을 높였다. 이러한 국제적 움직임은 가상자산을 더 이상 음지에 두지 않고, 제도권 안에서 관리하며 산업적 잠재력을 살리겠다는 전략이다. 한국이 이 흐름에 뒤처질 경우, 투자자들은 해외 불법 거래소에 더 의존하게 되고, 국가 경쟁력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3. 제도화가 가져올 긍정적 효과
가상자산 제도화의 가장 큰 장점은 투자자 보호다. 거래소에 일정 수준 이상의 자기자본을 요구하고, 보안 시스템과 내부 통제 기준을 법으로 규정한다면 최소한의 안전망이 마련된다. 발행되는 가상자산의 백서 공개와 회계 감사 의무를 강화하면 ‘유령 프로젝트’로 인한 피해도 줄일 수 있다. 나아가 명확한 제도적 틀은 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불확실성이 제거되면 합법적 자본이 유입되고, 혁신적 블록체인 서비스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예컨대, 디파이(탈중앙화 금융), NFT, 메타버스와 같은 신산업은 제도권 금융과의 연계가 필수적인데, 제도화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건전한 가상자산 산업은 한국이 글로벌 디지털 경제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4. 풀어야 할 과제
그러나 제도화가 단순히 규제 강화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첫째, 가상자산의 법적 성격을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 증권으로 분류할지, 상품으로 취급할지, 혹은 새로운 자산군으로 별도 규정을 둘지는 중요한 문제다. 둘째, 과도한 규제는 산업 혁신을 가로막을 수 있다. 가상자산의 특성상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른데, 법과 제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 셋째, 국제 협력이 필수다. 가상자산은 국경을 초월해 거래되는 만큼, 한 국가의 규제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자금세탁방지(FATF) 가이드라인과 같은 국제 기준과 발맞추는 동시에, 국내 실정에 맞는 법제를 마련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금융당국, 국회, 업계, 학계가 머리를 맞대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결론: 방임도 금지도 아닌 합리적 제도화
가상자산은 위험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 영역이다. 방임은 투자자 피해와 금융질서 혼란을 초래하고, 과도한 금지는 산업 혁신과 국제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합리적 제도화’다. 투자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되, 산업 발전의 기회를 열어두는 균형 잡힌 규제 틀이 마련되어야 한다. 연금, 부동산, 주식과 마찬가지로 가상자산 역시 제도권에서 관리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돼야 한다. 제도화를 통해 건전한 시장을 구축한다면, 한국은 위험을 최소화하면서도 블록체인 기반 신산업의 선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결국 가상자산 제도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디지털 경제 시대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 할 수 있다.